
함께 읽은 말씀
에스겔 18장 1-4절 / 마태복음 21장 28-32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속담이란 “오랜 세월을 거쳐 삶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이나 어떠한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간결하고도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거나 공감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속담은 우리네 인간들의 마음 속, 가치체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 말씀에도 속담이 등장합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었을 속담을 다루십니다. 이 속담은 예레미야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유명했던 속담 같습니다. 이 속담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연좌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다는 것은 아버지의 행동이 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볼 때 이 속담은 죄와 죽음에 대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아들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전에만 있었던 문화가 아니지요.
연좌제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범죄자의 가족에게 악플을 다는 사람들, 출신이나 환경에 따라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우리의 모습들 가운데 존재하지요.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하면 아들도 훌륭할 거라는 우리의 생각처럼 내가 선택하거나 만들지 않은 환경에 의해서 내가 평가받는 모든 상황이 일종의 연좌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많은 경험들이 이런 케이스들을 반복해서 확인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포도를 먹으니 아들의 이가 시다’는 이 속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속담을 거부하십니다. 물론 좋은 환경은 착한 아이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쁜 환경은 불량한 아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케이스를 일일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나름의 분류 체계를 만들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도 위험요소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굉장히 유용하고 편리한 기능입니다. 하지만 이 선입견과 편견이 사람에게 작동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분류법에 따라 그의 진짜 모습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영혼만큼이나 아들의 영혼도 하나님께 속한 귀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죄로 그 아들을 평가하지 않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선언에는 모든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렇게 ‘유용하고 편리한’ 분류 없이 불편하고 비효율적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지금 모습만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영혼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고백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새번역 기준으로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시킨 일에 ‘싫습니다’하고는 나중에 일을 하러 갑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하고 가지 않습니다. 흔히 이 비유를 말씀에 대한 순종의 이야기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복음서는 앞서 이 비유의 상황을 예수의 권위에 대해서 묻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의 대화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즉 이 비유는 당시에 요한과 예수를 믿지 않았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첫째 아들에, 믿었던 세리와 창녀들을 둘째 아들에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행동과 다른 말은 각 대상들에게 ‘기대되던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대제사장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믿지 않았고, 세리와 창녀는 믿지 않는 사람 같았지만 믿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배경과 상황 같은 것보다 정말 그들이 믿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그가 제사장인지, 세리인지로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습만이 하나님의 판단 기준입니다. 세상은 환경을 보고 배경을 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 아닌 다른 것들로 나를 포장하라고 말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들로 나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가치있다 평가하는 것들로 나를 채우려 하고 그 가치들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울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어떤 조건도 아니고 오직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분 앞에 홀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 평가되기엔 너무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내가 경험했던 편견이나 선입견 가운데 실제 모습과 달랐던 것은 무엇이 있나요?
Q2. 나는 신앙에서도 사람의 말, 직분, 경력, 이미지를 믿음보다 중요하게 보고 있지는 않나요?
Q3. “하나님 앞에는 지금의 나만 선다”는 코람데오의 의미가 위로가 되나요, 부담이 되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주만 의지해(마커스워십
https://www.youtube.com/watch?v=Dy82rJfUvNQ)
'주일말씀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건(260913) (1) | 2026.09.19 |
|---|---|
| 사랑의 빚진 파수꾼(260906) (0) | 2026.09.12 |
| 거짓이 없는 사랑(260830) (0) | 2026.09.05 |
| 그가 날 바라보시는 방법(260823) (0) | 2026.08.29 |
| 풍성한 식탁(260816) (1) | 2026.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