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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은 말씀
레위기 19:15-18 / 마태복음 22:34-46 / 데살로니가전서 2:1-8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성경의 모든 정신이 담겨 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조화시켜서 우리 신앙의 정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의 조화를 잘 나타낸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뒤에 어찌보면 엉뚱해보이는 ‘다윗의 자손’에 대한 논쟁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사두개인들과 논쟁이 마무리 된 뒤 시작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은 23장 끝까지 이어집니다. 22장 후반부에서는 다윗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는데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23장에서는 이웃 위에 군림하려 했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며 그들의 ‘이웃 사랑’이 얼마나 회칠한 무덤 같은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음에도 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민족의 이상향이라는 틀 속에 그리스도를 가두고 자신들이 편한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왜곡된 하나님 사랑은 그들의 이웃 사랑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다윗같은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이웃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이웃 사랑의 근본적 문제는 그들이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 사랑은 잘 하는데 이웃 사랑이 부족하다 그러니 둘 다 신경쓰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이웃 사랑이 빈약한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 사랑이 빈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진행했던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회상합니다. 그는 심한 반대 속에서도 자신의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교회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영광을 구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살전 2:8). 하지만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이 사역의 중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살전 2:4). 그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실천을 택일해야 하는 선택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교회를 사랑했던 헌신이 구분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실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웃’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성경 속 인물은 예수님을 향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번 주 말씀 나눔을 정리하면서 저도 하나님께 이 물음을 묻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런 명령들이 때로는 우리를 너무 버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정작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실망하며 스스로를 정죄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다시 사랑하기로 결단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지만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내 잘못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탓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까지도 내게 필요한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모든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이라는 말이 우리의 피할 그늘이 되어줍니다. 물론 이 ‘이웃’을 정의하는 경계를 넓혀 나가야 합니다. 민족적 경계, 지역적 경계, 소득이나 계급 같은 경계를 넘어 언젠가는 우리의 원수까지도 담을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사랑할 수 있느냐’ 이전에 ‘그를 내 이웃의 범주 안으로 넣을 준비가 되었는가’입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 나에게 무례했던 누군가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나의 이웃의 범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기 이전에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큰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이 바운더리가 보호막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삶의 무게를 무시하고 ‘원칙’과 ‘진리’의 잣대를 동일하게 들이댈 때 그것이 율법이 되고 폭력이 됩니다.

이웃이라고 해서 모두 사랑하는 것은 아니듯이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를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인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그를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오늘 내 삶에 누군가를 ‘이웃’이라는 범주 안으로 넣기로 결정하는 용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에는 기적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를 당신의 품 안으로 품으셨습니다. 사랑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용기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기대 안에 가두었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내가 편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나요?


Q2.  사랑하라는 말이 위로나 도전이 아니라 부담이나 폭력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나요?


Q3. 내가 안전하게 지켜야 할 경계와 넓혀가야 할 사랑의 경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참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