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은 말씀
시편 71편 1-6절
요한복음 1장 43-51절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을 때,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가운데 시편의 저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어려움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유가 우리가 찾아야할 질문의 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편 71편의 저자는 그가 간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71:6, 개역한글판)
시편 저자가 어머니의 뱃속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 삶의 본질, 근원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은 나의 의지나 취향, 경험이 생기기 전의 장소입니다. 단순히 말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 장소와 때라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규정하는 어떤 조건이나 가치보다 그분의 붙드심이 먼저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닥쳐올 때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삶의 부차적인 것을 뒤로하고 본질을 붙잡을 때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의 이야기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자주 오해되곤 합니다. 마치 점쟁이가 과거를 알아맞추는 것처럼 "너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 있다가 왔지" 같은 말을 듣고서 신기해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표현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열왕기상 4:25)
성경에서 이 표현은 솔로몬이 다스리던 태평성대의 시기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미가나 스가랴는 회복될 그날의 모습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미4:4, 슥3:10). 세상이 다시 솔로몬의 때처럼 되길 바라는 메시아주의를 상징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이런 표현으로 요약되는 인생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여러차례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런 기대들을 등에 업고 일어났던 반로마 저항운동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는 그의 대답에는 이런 경험에서 나오는 자포자기의 감정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옳다고 생각했던 기대들은 무너졌고 그의 삶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 인생의 순간에 나다나엘이 만난 그 남자는 지금껏 그가 그가 살아온, 추구해온 모든 순간들을 알고 있노라 말씀하십니다. 시편 71편의 기자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붙드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말하려 했던 그 삶을 이끄시는 본질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가치가 무너지고 길을 잃어버린 나다나엘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붙들고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장'은 사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말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여기서 'Love is ~' 라는 형식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주체가 되는 'Love+동사'의 형태를 사용합니다. 사랑은 마치 사람이 하는 것처럼 인내하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기뻐하고, 믿으며, 견딥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의인화된 하나님, 그분의 사랑의 실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그분이 없으면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고전13:1-3).
결혼할 때 아내와 결혼 선언문에 적어놓은 말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이렇게 날 속상하게 하지' 이해되지 않을 때, 그래도 그것이 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전제가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모든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오직 이 하나의 전제에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한 것을 필요로 하는 부분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고전13:9-10). 우리가 절망에 빠질 때, 길을 잃었을 때, 삶의 본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 모든 상황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할 것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을만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Q2.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나를 붙드셨다'는 시편 저자의 고백은 어떤 의미인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Q3.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전제를 나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 앞에 붙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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