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은 한 아기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한 아기의 나심이 어떻게 희망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메시지는 굉장히 허황된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가 자라서 실제 왕이 되고 구원자가 될 때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 예언의 시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원문에서 아기의 태어남을 과거형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기에 대한 묘사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예언은 지금 다가온 구원사건 앞에서 감춰져 있던 그 시작점을 돌아보는 맥락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태어났던 한 작은 아이는 지금 이 순간 ‘놀라우신 조언자’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평화의 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스스로 자라 열매를 맺은 씨앗의 비유처럼 모든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때 이루어지고 성취되었습니다. 감춰졌던 시간동안 모든 변수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저 다가온 구원의 날을 마주할 뿐입니다.
복음서는 어린 예수의 탄생을 기쁨과 평화의 날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날은 세상의 폭력이 죄없는 아기들의 목숨을 빼았던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 어둠 속에 비칠 빛에 대해서 말합니다.(사9:2) 어둠은 실체가 없습니다. 오직 빛이 가려져 있을 때만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빛을 말하지 않고 어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둠이 계속될 때 그것은 빛이 어딘가에 가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아무도 알지 못하게 태어난 한 아기처럼 그 소망은 긴 어둠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향해 비춰질 것입니다.
이 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세례요한이 베푼 가르침은 다가올 진노를 피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도끼를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기 때문입니다.(눅3:9) 이것이 그가 전한 ‘회개의 세례’의 한계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날은 심판의 날이고 두려움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불과 성령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주의 열심’(사9:7)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어둠의 시대를 살며 다가올 구원을 기다리는 대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둠 속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나가야 합니다.(빌4:7)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은 어둠일지라도 그 어둠 아래 감춰진 빛이 있음을, ‘하나님의 열심’이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내고 계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때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빛이 도래하고 바울과 빌립보교회처럼 그날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빌4:4-5)
https://youtu.be/QNjJfNJrHF0?si=P1eOlgXQW3U-NCsC
'주일말씀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복 많이(25년 1월 5일) (2) | 2025.01.05 |
---|---|
반복과 전진(24년 12월 29일) (0) | 2024.12.29 |
베들레헴 어린아기처럼(24년 12월 22일) (0) | 2024.12.24 |
그를 보고 그를 알리라(24년 12월 8일) (1) | 2024.12.13 |
더불어 함께(24년 12월 1일) (0) | 202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