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읽은 말씀
스가랴 9장 9-12절 / 마태복음 11장 16-19절 / 로마서 7장 15-25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재미있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장터에 앉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비유는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세다에 대한 경고로 연결되는 맥락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의 비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셨을 때는 그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며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보에 술꾼’이라며 또 거부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먹으라는 것인가요 말라는 것인가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말을 들을래?”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대학교 시절 전도여행을 가려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하기를 가르쳤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가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부모님께는 손 벌리지 않는다.” 그 때 선배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네 스스로 제한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언제나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 왜 문제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려 하는데, 마치 내가 심사위원이라도 된 것처럼 그 은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는 방법으로, 반대로 먹고 마시는 방법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의 마음을 전해도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결국엔 그 뜻과 다른 길을 가고 마는 우리의 모습이 비유에서 말하는 춤추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어린아이들 같지 않나요?
성경에는 ‘물없는 구덩이’라는 표현이 몇 군데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기기 전에 그를 가둬두었던 곳을 ‘물없는 빈 구덩이(창37:24)’로 표현했고, 예레미야서 중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가둬두었던 곳도 ‘물없는 구덩이(렘38:6)’로 표현됩니다. 당시에 이런 공간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으로 자주 쓰였다는 뜻이 되고, 예레미야에서 언급되는 내용으로 볼 때 그곳은 계속 그대로 두면 결국 굶어 죽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렘38:9). 즉,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기의 힘으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줄을 던져줍니다. 빠져 나오라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줄이 마음에 안 듭니다. 스가랴는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평화는 군마를 없애고 활을 꺾는 방식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을 쓸어버린 후에 따라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원하고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지요.
로마서에서 바울은 마치 우리 인간의 상황이 이런 ‘물없는 구덩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의 육체 속에 있는 죄가 우리를 끊임없이 깊은 구덩이로 끌어내리는 것 같은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 해도 육체 속에 있는 죄가 악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등장하는데 ‘선을 행하려는 내게, 악이 붙어 있다(롬7:21)’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는 나와 악을 행하는 죄를 별개의 존재로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붙어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1 더하기 -1은 0이 되는 것처럼 선과 악이 서로 붙어 있어서 결국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0으로 수렴하고 마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처럼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교만함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온전히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감사한 것은 바울이 이 모든 탄식 끝에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능력이 있어서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성은 여전히 튀어나와 나를 건지신 그분의 손길에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하면서 문제점들을 찾으며 불순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 구덩이에서 고스란히 떠내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은혜는 내가 선택하거나 골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는’ 태도로는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이건 이래서 되고, 저건 저래서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감사요, 경이로움입니다. 거름더미 사이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느라 거름은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경이로움이 우리에게 있길 바랍니다. 그런 감사함이 우리 삶에 있길 바랍니다. 많은 문제들에도 그 속에서 우릴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춤추고 우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경외의 첫 걸음이고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갖게 하는 믿음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는 태도가 내 삶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가정, 직장, 교회, 인간관계 등)
Q2. 구덩이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내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Q3. 이번 한 주 동안 '춤추고 울 줄 아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실천해 보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하나님의 음성을(시편 40편)
https://www.youtube.com/watch?v=27mRtzhU1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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