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읽은 말씀
사도행전 7장 55-60절 / 요한복음 14장 1-14절 / 베드로전서 2장 2-10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던 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말씀하시는데 도마는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5절)'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버지를 알고 있고 그분을 이미 보았다(7절)'고 말씀하시는데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8절)'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런 어긋남이 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 그들은 그 길도 알고 아버지도 본 것일텐데 왜 제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모르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어긋남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세가지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10절)'입니다. 두번째는 제자들이 보고 믿어야 할 '예수님의 일(11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하게 될 '그들의 일(12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의 일이 하나님의 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길을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말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봤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셋이 연결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연결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입니다. 많은 복음서가 있지만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이야기까지 발전시킨 사람은 누가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복음서는 사도행전과 많은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스데반과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눅22:69)"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이 말이 어떤 의미로 들렸을지는 명확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면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오?"라고 묻는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교하기 직전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행7:56)" 스데반을 죽이려 대제사장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까지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킵니다. 흔히 우리가 가상7언이라고 알고 있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가지 말 중에 누가복음이 수록하고 있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중에 두가지를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반복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라는 표현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행7:59)"라는 말로 반복되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23:34)"라는 표현은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7:60)"라는 말로 반복됩니다. 누가는 여기서 스데반이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된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유했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냥 색깔이 들어간 어두운 유리일 뿐이지만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그 찬란한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미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이런 어긋남은 서로 바라보고 있는 위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던 스데반은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그 길을 걷는 이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를 따라 산 돌이 된 우리는 또 다른 이들이 산 돌 되게 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에 백성이 아니었지만 백성이 되었고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자비를 입었습니다.(벧전2:10) 이 비유는 본래 호세아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호2:23) 후에 로마서에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비유로 확대되었습니다.(롬9:24-25) 베드로는 여기서 이 비유를 다시 사용하면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신 분의 업적을 선포해야 함에 대해서 말합니다.(벧전2:9)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종교같은 진지한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는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분이 어떻게 백성 아니었던 우리를 백성 되게 하셨는지, 자비를 얻지 못했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는지, 우리의 말로, 나의 고백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 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셨는지,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셨는지' 깨달을 것입니다. 스데반과 같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리스도의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나의 일상적인 활동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Q2. 머리로만 알다가 직접 행동(순종)해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던 진리가 있나요?
Q3.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어둠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그 길 따라(정신호)
https://youtu.be/wR0TtSncbDs?si=XaenaUJ9h2ZBnM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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