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읽은 말씀
사도행전 2장 42-47절 / 요한복음 10장 1-10절 / 베드로전서 2장 19-25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사도행전 2장의 본문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설교를 듣교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사도행전은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행2:43)'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단어를 '공포'와 동의어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들이 일으키는 기적이 무서워서, 자기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봐 모여 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두려움'은 '경외'와 같은 말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외'라는 말이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공포'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다 감시하고 있다가 나쁜 짓 하면 벌준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경외는 그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 맞춰지는 것, 하나님이 중심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바울의 교훈이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를 위해 모든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것도 같은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는 모든 자들이 도둑이고 강도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문을 통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문을 통해 들어와야 목자의 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 앞에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도둑이요 강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신 예수를 알아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본문을 인용하고 어떤 신학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여기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지식과 실천은 결국 자신이 돌봤어야 할 양인 한 사람을 쫓아내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었습니다.(요9:34) 눈먼 이가 눈을 뜨게 된 그 기쁜 사건 앞에 함께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신들의 판단/명예/지식'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을 읽을 때 그들이 했던 공동생활의 형태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후 교회가 집중했던 것은 그것과 다릅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1)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고, 2) 서로 사귀며, 3) 빵을 떼는 것과 4) 기도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앙생활의 형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며 서로를 돌보았던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그들이 집중하며 애썼던 '신앙생활'의 당연스러운 열매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호감을 샀습니까? 그들의 시스템이나 복지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때, 자신들의 신앙의 본질에 충실했을 때, 그들이 믿는다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삶으로 살아냈을 때 호감을 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끼리 모여 종교적인 것에 매진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국민의 75.4%가 교회를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5-20% 정도 된다고 하니, 사실상 기독교인들 제외하고 아무도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더 좋은 설교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가장 많은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지 않고(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는구나' 생각하지 않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다 말하는 가치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향이 너무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던 사람이 밖에서는 아파트 값 오르고 내리는 데에 누구보다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사랑을 말하는 교회에서 차별이 당연시되고 사랑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성적인 범죄들이 일어납니다. 평화의 왕을 섬기는 이들이 전쟁을 지지하며 교회 보상금을 받겠다며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봉사와 사랑이 우리가 믿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불법들과 상식적이지 않은 문화가 교회와 그들이 말하는 진리의 신뢰성을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시련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벧전1:6). 그리고 그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시련 속에서 본을 보이신 분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련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라는 베드로의 권면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믿음에 따라오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가 따라 걷는 삶의 결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사람을 교회로 끌고 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닮으려는 노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교회에서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일들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더 낮아지려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다른 것들은 자연스레 따라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주어서 세상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됩니다. 우리가 줄 것이라고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뿐이라고 베드로는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사는 것, 그 이름이 보여주신 가치를 추구하는 것, 그 이름을 보내신 이에게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보기에 우리가 믿는 것이 정말 가치 있어 보일 때, 우리가 정말 믿는대로 사는 것 같아 보일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은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나의 구체적인 일상(직장, 가정, 취미 등)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Q2. 세상이 교회에 실망하는 이유 중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분은 무엇인가요?
Q3. 나의 사랑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전략'인가요, 하나님을 닮으려는 '분투'인가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예수닮기를(심형진)
https://youtu.be/VxDA1MVfDf0?si=jqdHa5ilDb1CJu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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