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양심(260510)

2026. 5. 16. 09:49·주일말씀나눔

함께 읽은 말씀
사도행전 17장 22-31절 / 요한복음 14장 15-21절 /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베드로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팔복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고난 중에도 죄를 짓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함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이를 정의하며 말하는 베드로의 네 가지 교훈은 첫째, 두려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라. 둘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라. 셋째, 우리 안에 소망을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한 양심'이라는 단어를 선한 행위나 개인의 의로움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우리의 세례가 바로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한 양심이 개인의 의로움이라고 본다면, 베드로가 한 말이 의로운 사람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거나 선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이란 그야말로 도덕의 최소선으로서 세상에 책잡힐 것 없는 양심을 의미합니다.(16절) 베드로는 이것이 부활을 힘입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 아래서 살아간다면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은 도덕의 최소선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부활 능력의 열매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례,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난 선한양심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세례를 일정한 나이가 되면 거쳐가는 의례적인 예식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세례는 삶의 변화를 확인한 후에 행했습니다. 사도전승에 따르며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자들은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이나 환경에 있는지 확인되어야 했고 그들의 구체적인 습관과 행동을 바꾸도록 훈련되어야 했습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작은 도시 공동체에서 서로의 일상이 어느정도 확인 가능한 사회였기에 가능했겠지만 어쨌든 세례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확실한 변화가 확인되어야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죄 짓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교회는 죄인이 와서 변화되는 곳이라면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본회퍼가 비판했듯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값싼 싸구려처럼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는 교회의 자정능력을 무너뜨렸고 결국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이 당연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의 도덕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인을 향해 부어지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죄로부터는 돌아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결과여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가 '선한 양심'과 함께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 위에 서지 못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가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말하는 부활의 능력은 단지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희망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바울에게서 이처럼 부활의 능력을 힘입은 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 지성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한복판에서 그들의 종교성을 비판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말하는 그 신이 바로 세상의 창조주라는 그의 선언은 지혜를 자랑하는 그들이 정작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선포와 같습니다. 그들의 종교성은 하나님을 찾는 방향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거리낌도 없는 '선한 양심'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 법정이 자신에게서 어떤 심판할 거리도 찾지 못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세상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의지하며 세상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용기입니다.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면, 말할 것을 준비하는 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벧전3:14-15)

 

요한복음은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함께 하심'과 연결합니다. 교차대구적인 구조를 통해서 요한복음은 성령이 우리 안에/우리와 함께 계시고(17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20절) 표현들을 앞뒤로 반복하면서 가운데 있는 부활의 메시지(19절)을 강조하는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기억하는 부활절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은 오늘 내 삶에 살아 있는 능력이고 나의 삶을 바꾸며 또한 다른 이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려움 너머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한 양심을 회복한다면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다시 희망을 노래하는 부활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양심'은 개인의 의로움이나 도덕적 완벽함과 어떻게 다른가요?



Q2. 교회가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조차 지키지 못할 때, 우리 안의 소망을 전하는 것이 왜 불가능해질까요?


Q3. 이번 한 주간, '선한 양심'을 지키며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할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내 주는 살아계시고(통일찬송가 16장)

https://www.youtube.com/watch?v=v1Bk3TJccRU&list=RDv1Bk3TJccRU&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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