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읽은 말씀
이사야 51장 1-8절 / 마태복음 16장 13-20절 / 로마서 12장 1-8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한 문장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고백은 이후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신앙고백의 전형으로 많은 이들을 통해 동일하게 고백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카톨릭이 여기서 ‘이 반석’을 베드로라는 인물로 보고 교회가 베드로라는 1대 교황 위에 세워진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개신교는 이 반석을 베드로의 고백으로 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이해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베드로라는 개인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교회를 보셨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번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물음에 베드로가 올바르게 대답하였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18절에서 “나도 너에게 말한다”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이 앞선 베드로의 대답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은 형식적으로도 베드로의 대답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베드로의 표현과 정확하게 같은 형태로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기서 ‘너는 베드로다’라는 표현은 이 대답이 베드로의 대답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장치의 기능을 갖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대답은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과 예수님이 대답이 같은 형태로 대칭되고 있다면 그 대답이 전제하는 질문 역시 연관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면 예수님의 대답 역시 ‘나는 너희를 누구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즉,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작은 개인에게서 교회의 시작을 보셨습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나 베드로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이십니다.(마16:17) 예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고 그가 누구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내 역할은 무엇이고, 내 분수는 무엇인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 과제입니다. 바울이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롬12:3)’ 살라고 할 때, 그 말은 자기 맡은 바를 지키면서 선넘지 말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해야할 일을 잘 못하고 있으니 열심히 하라는 말일까요? 결국 이것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만 판단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때론 참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누구라고 하는지 들어보라’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분별입니다. 우리는 분별이라고 하면 내 밖에 있는 무언가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분별은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가 바라보시는 내가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참된 분별입니다. ‘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려면 내 몸을 알아야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드려야 할 합당한(reasonable)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듯이 하늘 아버지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시는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에는 ‘의’ 또는 ‘공의’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의’나 ‘공의’라고 하면 정의나 질서 같은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히브리어에도 이런 법적인 정의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미슈파트’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이사야의 말씀에서 ‘의’나 ‘공의’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지만 이 중에 미슈파트를 사용하는 것은 4절의 단 한번 뿐입니다. 오히려 다른 단어들은 ‘체다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미슈파트’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법적인 정의보다는 ‘자비’나 ‘은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책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다카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사야가 예로 들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이들은 자녀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을 갖게 됐습니다. 이것은 법적으로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체다카)를 따르던(구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비(체다카)를 아는 이들이 되게 하십니다. 내가 그분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너머 다른 이들도 자비가 필요한 자임을 아는 사람, 그 자비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자만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서 보신 것은 그의 가능성, 그의 재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체다카(자비)를 의지하는 것, 나를 자비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따르는 것을 넘어 그 자비를 아는 자가 되는 자로 마음판에 율법을 새기신 자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어떻게 나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너는 베드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어떤 시선을 보여줍니까?
Q2. 나 자신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Q3.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사람은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Born Again(제이어스)
https://www.youtube.com/watch?v=roh3jsvkT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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