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받아들인다는 건(260913)

2026. 9. 19. 15:36·주일말씀나눔

함께 읽은 말씀
창세기 50:15-21 / 마태복음 18:21-35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형제가 자꾸 죄를 지으면 몇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어느정도 기준이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번까지는 용서해주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랍비들의 견해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가 제시하는 일곱번이라는 숫자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에 비해서 꽤나 많은 숫자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번이라는 숫자는 히브리 문화에서 완전수를 의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 질문을 했던 이유를 단순한 궁금증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베드로의 자신감이 묻어 있습니다.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주님 제가 일곱번까지는 될 거 같아요’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사람이 느끼기에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도 이 대답은 완전수(70)X완전수(7)의 조합으로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기독교인은 늘 바보처럼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거냐’라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일곱번이나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베드로의 자신감에 대한 대답으로 본다면 이 말은 ‘무한히 용서해라’보다는 ‘해볼테면 해봐라’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일곱번은 ‘내가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흔번씩 일곱번은 ‘니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몇번이나 용서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기 종들과 셈을 하는 한 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왕에게 빚을 져서 잡혀온 종이 진 빚은 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현재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3조에서 130조 사이라고 하는데 그야 말로 개인이 가진 채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금액입니다. 앞서 70X7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이 액수는 엄청나게 많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종은 그 빚을 탕감받습니다. 이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실 이 종이 기대했던 최선은 왕이 자비를 베풀어서 채무 이행을 늦춰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26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기대한 것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종이 방금 빚을 탕감받은 후 나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서 그에게 빚을 독촉하며 그를 감옥에 가뒀다는 것입니다.

 

이에 왕은 그 종을 다시 불러 탕감해줬던 빚을 다시 갚으라며 책망합니다. 그가 독촉한 백 데나리온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현재 시세로 2,000만원 정도 하는 꽤나 금액이니 누구에게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탕감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왕은 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노라고 말합니다(33절).’ 동료 종은 탕감받은 종과 동일한 요청을 했습니다.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29절).” 방금 큰 용서를 받은 그가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동료의 상황을 ‘불쌍히 여겼다면’ 탕감은 못하더라도 그가 요청하는대로 기다려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 그가 받은 용서가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받았으나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동생을 애굽에 팔아넘겼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이 두려워 그에게 가서 용서를 구합니다. 성경은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떤 눈물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그 의미가 참 안쓰럽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이미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큰 뜻안에 있노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창45:5). 그 후 17년 동안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의 가족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며 아무 일 없이 살았습니다. 이미 요셉은 그들을 용서했지만 형들은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요셉을 팔아넘겼던 그 밤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흘린 눈물은 이미 용서했으나 그 용서의 삶을 살지 못했던 형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몇번 용서해줘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용서라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용서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오히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 채 여전히 죽음과 보복의 공포, 심판과 징계의 공포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용납되었음을,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용서는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을 향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몇번을 용서해야 하는지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은 항상 손해보고 호구가 되어야 하는지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용서받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어떤 감정이 드나요? 



Q2. 이미 용서받았는데도 붙잡고 있는 죄책감이 있나요? 


Q3. 내가 받은 용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함께 부른 찬양

나는 용서받았네(I'm accepted)

https://www.youtube.com/watch?v=AUfhjSF71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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