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VS 행위?
개신교와 천주교는 같은 기독교에 속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서로 다른 종교처럼 분류되고 있지만, 큰 의미에서 '기독교(Christianity)'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같은 정경을 사용하고 같은 신을 섬기며 같은 교리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두 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종교개혁에 근거한 개신교인들은 둘 사이의 차이를 말할 때 주로 '행위로 구원 얻는다 VS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라고 요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에 대해서 카톨릭의 입장에서도 동의할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율법과 대비되는 '조건 없음'의 다른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적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다고 행위가 완전히 필요 없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약2:17)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믿음과 행위는 우리 구원에 둘 다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적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라는 행위(조건)'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은혜아닌 것이 되고맙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는 믿음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고백하고 행위는 구원의 열매라고 설명하지요.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눅6:44). 열매가 없으면 앞에 것은 가짜입니다. 즉, 값없이 받았다면(믿음이 있다면) 값없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행해야 한다).
카톨릭도 기본적인 전제는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카톨릭과 일부 개신교 교단 사이에 이미 신학적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감리교, 루터교·천주교와 칭의론 합의 - 에큐메니안
▲23일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한 감리교, 카톨릭, 루터교회의 수장들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에 대한 통일된 결의문에 서명했다-ⓒ장익성 7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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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카톨릭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당시의 카톨릭이 성물 숭배나 면죄부 판매를 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반영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때라면 몰라도 사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구분은 다른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편견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때의 카톨릭과 지금의 카톨릭이 다른 걸까요? 아니면 마틴 루터가 그 본질을 오해했던 것일까요? 아니요, 당시의 카톨릭과 지금의 카톨릭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틴루터가 카톨릭을 오해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성경 VS 교회!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성경과 교회'입니다. 물론 개신교는 성경을 잘 믿고 카톨릭은 성경을 안 믿는다는 말은 아니구요.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졌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로 성경을 주셨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길게 늘려서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특별히 신약성경을 볼 때, 이 책들은 처음부터 성경을 쓰기 위해서 기록된 것도 아니고 기록되고 한동안은 성경이라는 인식 없이 사람들에게 읽혀지던 책이었습니다. 그랬던 글들을 모아서 우리가 알고 있는 27권의 신약성경으로 확정하는 작업을 '정경화'라고 합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신약성경 목록을 확정했습니다.
여기서 카톨릭의 입장과 개신교의 입장이 갈립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결국 그 책들을 종합하고 그것을 '성경'이라고 확증한 것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와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성경'을 만든 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성경보다 우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 역시 교회, 특히나 교회의 수장으로서 베드로 정통성을 물려받은 '교황'이 갖게 됩니다. 루터 당시에 카톨릭의 모습은 최종 권위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조직이 타락한 결과였습니다. 개신교는 지금껏 존중받아오던 교회의 권위가 타락하면서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현실 앞에서 시작됐습니다.
개신교의 탄생과 의미
개신교는 1517년 마틴루터가 뷔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루터의 반박문은 인쇄술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급속도로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습니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문서와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것이지요. 즉, 사람들이 직접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읽기'라는 행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권위'를 대체하는 새로운 권위를 인식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성경의 권위'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가치 중에 한가지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행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루터는 라틴어로만 쓰여있던 성경을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노력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존 위클리프 역시 고대 영국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루터 이전에 많은 종교개혁의 목소리들도 하나같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강조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기 시작한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교황이라는 개인에게 집중되었던 신적 권위를 각 개인에게로 가지고 온 것이 개신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직접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됩니다. 바로 이 권위의 차이가 카톨릭과 개신교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위경 선택의 문제에서 오는 마리아 숭배라던가 연옥의 문제 뿐 아니라, 여타 여러가지 신학적 노선의 차이도 바로 이 권위의 차이에서부터 오는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카톨릭이 과거의 카톨릭처럼 성경에 접근하기 어려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카톨릭이 성경보다 인간의 가치를 따른다는 말도 아니고, 카톨릭 성도들은 성경을 모른다는 말도 아닙니다. 개신교라고 해서 성경을 개인이 맘대로 해석하는 것을 무한정 용인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읽는다는 행동을 넘어서 그것을 해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를 물을 때, 엄밀한 카톨릭 신학은 성도에게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개신교는 카톨릭과 차이를 갖습니다.
저항하는 자, 읽는 자, 해석하는 자로서의 개신교
개신교는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항의하다, 저항하다'의 뜻을 가진 'protest'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 마디로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카톨릭의 '무엇'에 저항한 것일까요? 바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항의 핵심은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에 의지해 스스로 성경을 읽습니다. 만약에 스스로 성경을 읽지 않고 누군가 말해주는 권위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개신교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나 '어떤 교수님' 같은 인간적 권위에 기대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 그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지에서 오는 오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내가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것을 돕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물론 이런 강조에서 오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왜 개신교는 이렇게 교단이 많은가요?'라는 물음을 종종 듣습니다. 국내에 장로교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고 하지요. 성경해석을 통제하는 단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해석의 권위를 스스로 넘겨주려는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스스로 읽고 해석한다는 행동이 갖는 부담감과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모임은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그럴 수 없는 이들과 비교해 특권을 누리는 권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많은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권위는 스스로를 개혁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을 돌아보고 권위를 취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성경의 권위 앞에 내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검(히4:12)'은 나 자신을 겨누는 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개신교일 수 없고, 말씀의 칼을 스스로에게 돌리지 않고 타인에게 돌리는 자 역시 개신교인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향해 겨누는 칼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모든 권위와 싸우고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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